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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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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마지막 회>]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박정희와 노무현을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는 3선개헌과 유신 선포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하지만 그의 성공적인 경제정책은 한국이 선진 산업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주춧돌이 됐다. 진보주의자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참여민주주의와 균형발전을 추구했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노무현 시대는 끝난 게 아니라 아직 오지 않았다.
 

이기획을 진행하면서 가졌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지식인의 범위를 어디까지 둘지였다. 오늘날 지식인이라면 흔히 교수, 작가, 그리고 언론인 등을 지칭한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 지식인은 대개 유학자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현대사회에서 정치가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까. 세계적으로 보면 지식인이 정치를 겸업한 경우가 없지는 않다. 예를 들어,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Vaclav Havel) 대통령이나 브라질의 페르난도 카르도소(Fernando Cardoso) 대통령이 그러하다. 하벨은 작가이기도 했고, 카르도소는 사회학자이기도 했다.

지식인과 정치가는 사실 중첩되는 영역이 적지 않다. 지식인의 과제 중 하나가 지식 탐구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모색하는 데 있다면, 정치가 역시 자기 사회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지식과 정치 또는 지식과 권력은 매우 긴밀히 관련돼 있다. 지식은 정치 또는 권력을 위해 봉사하기도 하지만, 바로 그 권력과 정치를 혁신하는 문제틀을 제공하기도 한다. 그 문제틀이 이 기획에서 다루는 시대정신이기도 하다.

이제 기획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우리 현대사에 큰 그늘을 드리운, 여전히 영향력이 지대한 두 명의 정치가를 다뤄보고자 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바로 그들이다. 박정희와 노무현은 물론 지식인이 아니다. 한 사람은 정치가가 되기 전에 군인이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변호사였다. 하지만 이들은 지식인적 성향이 두드러진, 각각 보수적·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정치가들이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상징

문제적인 이 두 사람을 다루는 이유는 다름 아닌 시대정신에 있다.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두 개의 시대정신은 산업화와 민주화였다.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우리 사회에 부여된 가장 중요한 시대적 과제는 ‘나라 만들기’였다. 이 나라 만들기의 구체적인 목표가 경제적 산업화와 정치·사회적 민주화였다. 산업주의와 민주주의로 바꾸어 써도 좋은 이 시대정신을 대표한 정치가로는 박정희, 노무현, 그리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에 우리 사회 산업화가 본궤도에 올랐으며, 김대중 시대와 노무현 시대에 민주화가 본격화됐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상징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은 민주화의 상징이다. 여러 점을 고려할 때 박정희의 정치적 맞수는 김대중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김대중이 아니라 노무현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서 노무현을 살펴보려는 것은 더없이 극적인 노무현의 삶이 486세대를 포함해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에게 여전히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여론조사를 보더라도 박정희와 노무현은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손꼽히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산업화 세력 대 민주화 세력, 박정희의 시대정신 대 노무현의 시대정신이 맞서왔으며, 지식사회 역시 이러한 구도에 대응해왔다. 서론은 이쯤하고, 곧바로 두 사람의 삶과 시대정신, 그리고 정치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

박정희 시대와 모더니티

그동안 나는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해 두 번 글로 쓴 적이 있다. 하나는 근대성의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평가한 것이며(‘한국의 현대성과 사회변동’, 1999), 다른 하나는 박정희의 시대정신을 다룬 것이다(‘격동! ‘박정희 시대’에 다시 서다’, 월간중앙, 2008). 여기서 박정희에 대한 논의는 이 두 글을 참조했다.

주지하듯이 박정희는 산업화 시대를 열고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한 정치가였다. 1961년 5·16쿠데타부터 그가 돌연 서거한 1979년까지 박정희 시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변화가 컸던, 경제적 모더니티가 격렬하게 진행된 시간이었다. 19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이 기간에 우리 사회는 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농업사회로부터 공업사회로 바뀌어갔다. 모더니티가 ‘멋진 신세계’라면 우리 역사에서는 박정희 시대에 와서야 사슬 풀린 프로메테우스와 같은 신세계의 모험이 시작된 셈이다.

지식사회 역시 박정희 시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어용’과 ‘재야’의 이분법이 등장한 것도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체제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당시 지식사회는 물론 현재의 지식사회를 가늠하는 중요한 이분법 중 하나다. 우리 지식사회를 주도하는 50대 지식인들 역시 박정희 시대로부터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진보적 사회학자인 조희연 교수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바 있으며,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지식인운동과 시민운동을 이끌어왔다.

최근 조희연은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라는 책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 책은 비판적 관점에서 박정희 시대를 검토하지만, 새마을운동을 포함해 박정희 체제의 긍정적 측면도 적극적으로 주목한다. 조희연의 이러한 양면적 평가는 박정희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낸 진보적 지식인이 갖는 복합적 내면의식의 일단을 보여주는데, 이는 박정희 시대가 그만큼 문제적인 시대였음을 뜻한다.

박정희 개인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1917년 경북 선산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선생의 길을 걸었다. 이후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 광복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군인이 돼 김종필, 이후락 등과 함께 1961년 5·16쿠데타를 감행해 우리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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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마지막 회>]
민주주의 희생해 산업화 성공시킨 독재자 박정희, 상식과 원칙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자 노무현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그동안 5·16을 어떻게 명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당시 쿠데타 주역들은 5·16을 ‘군사혁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배계급 내의 일부 세력이 무력 등 비합법적 수단으로 정권을 탈취하는 기습적 정치활동’이 쿠데타라면, 5·16은 명백히 쿠데타다. 문제는 쿠데타가 낳은 결과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3년 결국 대통령에 당선됐고, 산업화를 향한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박정희 시대는 우리 산업화의 역사에서 일대 전환기였다. 구체적으로 1960년에 64%였던 농·어민이 1980년에는 31%로 감소했다. 또 중화학공업화가 진행된 19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갖췄다.

생활수준과 생활양식 역시 크게 변했다. 1961년 87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979년에는 1597달러로 증가해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더불어 급속한 경제성장은 아파트·텔레비전 등으로 대표되는 도시적 생활양식을 보급했고, 팝뮤직·할리우드로 대표되는 미국문화의 유행을 가져오기도 했다.

‘국가와 혁명과 나’

개인적 경험을 돌아봐도 박정희 시대는 나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차지한다. 1960년대에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은 시골에서 자랐지만, 도시로 이주해 온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모더니티의 세례를 받았다.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포항제철을 구경하며, 지하철 1호선을 타보기도 했다. 동시에 어린 나이였지만 긴급조치와 남북 대립, 민주화운동 등을 목격하면서 당시 암울한 정치 현실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기도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박정희 시대의 이러한 체험은 나의 사회적, 개인적 정체성의 원형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박정희의 저작 ‘국가와 혁명과 나’는 그의 시대정신을 집약하고 있다. 이 책은 1963년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초고를 박상길이 정리한 것이다. 박상길에 따르면, 이 책은 박정희의 저작 가운데 철학에서부터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인생관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을 가장 정확하게 담고 있다고 한다.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나서기 직전에 씌어진 만큼 이 책은 박정희의 정치철학과 시대정신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5·16쿠데타에 대해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식의 확립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혁명이며, 국가의 재건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혁명”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혁명 이념의 연장선상에 1960년대의 조국 근대화 전략이 놓여 있다. 박정희는 가난이 자신의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말한다. 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그는 자립경제를 위한 산업화를 강조한다. 자립경제 건설은 “혁명을 통한 민족국가의 일대 개혁과 중흥 창업의 성패 여부를 판가름하는 문제의 전부이며, 그 관건”임을 주장한다. 자립경제에 대한 그의 열망은 앞서 지적했듯 19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고도 경제성장을 이루는 경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주목할 것은 이 책에서 박정희가 자신의 주요 이념의 하나로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쑨원(孫文)의 중국, 메이지유신의 일본, 케말 파샤의 터키, 가말 압델 나세르의 이집트 등 민족주의가 두드러진 외국 사례들을 비교하고 있다. ‘퇴폐한 민족 동의와 국민 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는 쿠데타의 공약은 5·16 군사정부의 민족주의적 지향의 일단을 보여준다.

현재의 시점에서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정책을 어떻게 볼 것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와 관련된 핵심 쟁점은 경제적 산업화에 권위주의 정치가 불가피한지의 문제다. 이는 권위주의가 경제성장에 효율적이라고 해서 민주주의를 유보하고 개발독재를 선택해야 하는지,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이 인권과 정치적 자유보다 중요한 것인지의 문제이기도 하다.

1960년대 당대의 시선에서 보면 박정희식 발전 모델은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6·25전쟁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사회안정에 대한 희망을, 보릿고개의 암울한 현실은 경제성장에 대한 열망을 낳았으며, 이러한 희망과 열망은 위로부터의 국가적 동원을 통한 산업화에 유리한 토양을 제공했다. 개인적 체험을 돌아봐도 1970년에야 흑백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던 나는 1979년 대학에 입학할 때는 이미 다양한 문명의 이기를 두루 누리고 있었다.

문제는 경제성장에 성공했다고 해서 박정희식 모델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박정희식 모델이 경제성장과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데 과연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있다. 1969년의 3선 개헌에서 1972년의 10월 유신에 이르는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한 부정, 특히 유신체제의 암울한 독재는 이 시대가 얼마나 비민주적이었는지를 입증한다.

박정희 시대의 재평가

박정희식 모델은 경제적 산업화를 위해 정치·사회적 민주화를 희생시켰으며, 이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 모델은 중앙정보부로 대표되는 물리적 폭력에 기반을 둔 정치적 지배를 획책했으며, 그 결과로 나타난 침묵의 사회는 박정희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었다. 요컨대 박정희 시대는 그 명암이 뚜렷한 시대였다. 우리 사회를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변화시키는 고도성장을 가져온 산업화의 시대였지만, 동시에 정경유착이 관행이 되고 인권탄압이 가해진 권위주의의 시대이기도 했다. 더불어 박정희 시대에 뿌리내린 성장지상주의와 군사문화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 심층의식의 일단을 이루고 있다.

   (계속)